사부곡

지난 주, 나의 스승이자 절친인 아버님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드렸다.
어느 누구든 아버님을 여의고 슬프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나에게 내 아버님은 참으로 특별한 분이셨다. 

그 당시, 흔치 않았던 국제결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 잘 통하지 않더라도 마음만 잘 통하면 된다며 결혼을 쾌히 승락하신 분이다. 어느 누구도 부자간에 꽃길만 걸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와 잠시 사이가 소원해진 적도 있었지만 아버지하고 부르고 달려갔더니 그저 고마워만 하시던 아버님이시다.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교사를 하시다가 할아버님의 대를 이어 한의사가 되셨던 아버님은 자식들이 있는 미국에 오시기 전날까지도 하루에 100여명의 환자를 돌보시던 분이었다. 환자들 중에는 유일한 독립운동 생존자도 계셨고 유명인사들이 그치지를 않았다. 주일도 교회에 다녀오시고는 곧바로 환자를 돌보실만큼 환자들에게 애정이 있으셨던 분이다.

그렇게 바쁘게 돈을 버셨어도 참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셨던 분이기도 하다. 자식들에게는 교육의 중요성을 가르치시고 공부시키는 돈만큼은 절대 아까워하지 않으셨던 아버님이시다. 

식구들과의 일주일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던 아버님… 그렇게 투덜대던 내가 아직까지 식구들과 일주일 여행을 하지 못한다. 흉보면서 배운다고 했던가…. 건강 관리 또한 철저하셔서 고령으로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도 시니어 건강세미나 하시고, 밭을 가꾸시며 층계를 뛰어다니시던 분이다. 

난 아버님은 100수도 넘게 사실줄 알았다. 도리어 내 건강을 걱정하던 아버님께서 어느날 갑자기 토하고 쓰러지셨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은 결과 대장암으로 대장이 막혔다고해서 급히 수술을 받으셨다. 수술은 성공리에 잘 마쳤지만 아버님은 항암치료를 거부하셨다. 나이도 있고 하니 암을 친구삼아 같이 사시겠다고 하셨다. 죽음은 자연의 법칙이니 순종하며 사시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님이 편찮으시기 전에도 언제나 출퇴근을 알리며 아침 저녁으로 전화하고 가보는 편이었다. 하루는 모임에 가서 아버님 옆에 앉아서 아버님과 계속 대화를 하는데 다른 분들이 부자가 그렇게 사이좋게 대화하는 것은 처음 봤다며 비결이 뭐냐고 물으셨다. 아버님은 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반복하시는 편이었다. 전에는 왜 그러시나 핀잔도 드렸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반복되는 말씀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렇게 강조하시는 것은 주로 건강에 관한 이야기셨는데 수백번을 들어도 고쳐지지 않는 나의 운동습관을 보면 더 들어야 했을 것 같다. 

돌아가시기 얼마전 , 아버님이 꿈을 꾸셨는데 천국에 다녀오셨다고 했다. 천국은 섬인데 맑은 바다위에 줄다리가 놓여 있어 그 다리를 건너 가셨더니 너무 아름답고 좋더라구 하셨다. 맛있는 음식도 많고 사람들이 나와 반겨주었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니 빨리 가고 싶다고 하셨다. 죽음을 준비하시는 것 같았다. 마지막 날까지 고통이 심할 때마다 약으로 고통을 줄여드렸지만 옆에서 보는 나는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 내가 조금만 아파도 약을 지어주시고 건강을 강조하시던 아버님을 앞에 두고 내가 해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참 안타까웠다. 

어머님과 동생이 찬송가와 말씀으로 편히 가시도록 애를 많이 써 주었다. 조의금을 받지말라고 하시고 장례는 검소하게 치르라고 하셨는데 소문내지 않은 말이 천리를 가 성대한 환송식을 하게 되었다. 받지말라고 하시던 부조는 전액을 장학금으로 기증해서 교육에 큰 의미를 두셨던 아버님을 기억하려 한다.

이제 아버님이 달여주시는 보약은 없지만 천국에서 보내주실 아버님의 사랑의 보약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힘이 난다. 이제는 아버님을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대화하면서 마음의 공간을 채우고자 한다. 이번에 마음을 나누어 주신 모든 분들이 내 마음의 공간을 채우듯….

<전종준 변호사, VA>

<출처:  http://dc.koreatimes.com/article/20190522/12488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