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 대법관의 죽음과 이민법
약 13년 전 어느날, 한국의 국영 TV방송국 프로듀서로 부터 전화가 왔다. 방송 취재팀이 워싱턴을 방문하여 미 연방 대법원 제도에 대한 심층 보도하는 다큐멘타리 프로그램을 제작할 예정인데 나에게 연방 대법관과의 인터뷰를 주선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일반적으로 미 연방 대법관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회피하고 있는 까닭에 인터뷰가 가능할 지 자신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미 연방 대법원에 접촉을 하여 한국 TV 방송국이 미 연방대법원에 대한 제도와 운영방법등을 비교 분석하고자 인터뷰를 요청한다고 전했다.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미 연방 대법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법관 한분이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 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내용을 TV 방송국에 전했고, 방송팀은 워싱턴에 있는 미 연방 대법원을 방문하여 그 대법관과 역사적인 인터뷰를 하고, 방송프로를 만들 수 있었다. 그 대법관이 바로 안토닌 스칼리아 이었다. 그런데 그 스칼리아 대법관이 지난 주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먼저 미 연방 대법원 판사는 종신제이다. 즉, 한국의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임기제인 것과는 달리 미 연방 대법관의 임기는 종신제인데 그 이유는 공정한 재판을 위해 정치적인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스칼리아 대법관은 1986년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어 30년간 대법관으로 재직하여 현재까지 최장수 재직 대법관으로 남게 되었다.
9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 연방 대법원에서 스칼리아 대법관의 사망으로 인해 보수 5대 진보 4로 나누어 졌던 연방 대법원의 구성에 지각 변동이 생길 전망이다. 강경보수의 대명사였던 스칼리아 대법관의 사망으로 인해 앞으로의 연방 대법원은 일시적이나마 4-4로 팽팽하게 갈라지게 될 것이다. 이로 인해 현재 미 연방 대법원에 계류 중인 경제와 안보 그리고 이민에 관련된 중대한 케이스에 대한 정치적 분쟁을 낳아 큰 소용돌이에 빠질 가능성이 예상된다.
앞으로 최고 법원에 임명될 한명의 대법관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미국의 운명이 좌우될 것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따라서 미치 맥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 대표는 오바마 대통령 잔임기간동안에는 대법관 임명동의를 하지 않겠다고 벌써부터 포문을 열었다. 또한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오바마 대통령이 지명하는 대법관 후보에 대해 ‘필리버스터(Filibuster-의사 진행 방해자)’가 되어서라도 임명동의안을 막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조만간 대법관 후보자를 지명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만약 오바마 대통령이 지명한 중도 진보 선향의 대법관이 임명이 될 경우, 약 30년 만에 처음으로 진보 우세 연방 대법원이 구성될 것이다.?그러나 만약 상원에서 다수당인 공화당이 오바마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의 임명 동의안을 가결시키지 않을 경우 어떤 사태가 발생할 것인가?
민주당의 오바마 대통령 보다는 공화당 측에 오히려 손해가 될 것이란 추측도 있다. 왜냐면 현재 13곳의 미 연방 고등법원 중 9곳이 오바마가 임명한 진보 성향의 판사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만약 연방 대법원에서 새로운 대법관을 기다리지 않고 4-4로 결정이 날 경우 연방 고등법원의 결정대로 확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1100만 이민 서류 미비자의 추방을 유예하는 오바마 행정명령에 대한 케이스는 불안한 위치에 놓여 있다. 왜냐면 이 케이스는 보수 성향이 강한 제5관할 지역의 연방고등법원 부터 올라온 케이스이기에 만약 연방 대법원에서 4-4의 결정이 날 경우, 연방 고등법원 결정대로 오바마 행정명령은 힘을 잃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명의 대법관의 사망이 앞으로 있을 대통령 선거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부시와 고어 선거전에도 미 연방 대법원의 결정에 의해 부시가 당선되었다. 부시는 ‘당선된 (elected) 대통령’이 아니라 ‘결정된(Decided) 대통령’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스칼리아 대법관의 사망은 미국에 또 다른 위기이자 기회가 될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스칼리아 대법관을 13년 전에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