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볕이 나무를 물들이고 있다. 엊그제만 해도 그리도 푸르던 나무는 이제 여기 저기 물감을 뭍이고 있다. 집 앞에 커다란 나무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막아주어 여름이면 나무 덕을 꽤 보고 있다. 그러나 이제 곧 그 나무는 나에게 큰 일감을 안길 것 같다. 큰 나무 답게 떨어지는 낙엽이 장난 아니기때문이다. 벌써 걱정을 하는 것이 나무 때문에 시원했던 시간들을 잊어버리고있는 건 아닌가 싶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나는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의 대부분은 어려운 일로 나를 찾아온다. 억울하거나 분쟁에 휘말렸거나, 아님 신분의 문제로 고통을 받을 때이다. 그 순간 나는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건이 끝난 후에는 나는 그들의 머리 속에 남아 있지 않는 것 같다. 마치 내가 나무 때문에 시원했던 것을 잊어버리는 것 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인심이 야박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인간관계의 많은 부분은 ‘필요’라는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할 때 만나고, 그 필요가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배신도 아니고, 특별히 나쁜 일도 아니다. 인간관계의 가장 현실적인 모습일 뿐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건이 끝난 뒤에도 명절이면 카드를 보내오는 분들이 있다. 가끔 안부를 묻고,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라고 인사를 전하는 분들도 있다. 이제는 나를 변호사로서 찾을 일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 분들을 만나면서 저는 또 하나의 진실을 배웠다. 필요는 사람을 만나게 하지만, 감사는 사람을 남게 한다는 것이다. 늦은 나이에도 나는 매일 배우고 산다.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서도,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를 보면서도 나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필요만으로 맺어진 관계는 목적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끝나지만, 감사가 있는 관계는 목적이 끝난 뒤에도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을 본다. 상대를 단순히 도움을 준 사람이나 물건이 아니라, 내 삶의 한 부분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의 삶도 그렇다. 부모와 자식, 친구와 스승, 동료와 이웃…. 처음에는 서로의 필요 때문에 가까워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관계가 계속되는 이유는 필요 때문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신뢰와 존중, 그리고 감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감사는 관계를 인연으로 이어주는 힘이기도 하다.
진정한 감사는 마음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받고 살아왔는지를 깨닫는 순간, 나만의 풍요로움에 머무르기보다 누군가의 부족함과 외로움,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마음까지 들여다보게 된다. 어쩌면 성숙한 감사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것을 넘어, 남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들을 수 있는 마음. 내가 풍족할 때 그것을 혼자 누리기보다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마음. 그리고 작은 것이라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 말이다.
이 가을, 나뭇잎이 아름답게 물들 듯 우리의 삶도 감사로 물들어,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고 한층 더 성숙한 관계를 맺어가는 풍요로운 계절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