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공자 아버지 묻으러 아들이 한국 못 간다니… 말이 됩니까

재미동포 백정순씨, 尹대통령에게 국적법 개정 탄원서

“아버지를 고국에 안장하려는 아들이 한국을 찾을 수 있게 되길 눈물로 호소합니다. 아들처럼 한국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전 세계 동포들을 위해 불합리한 법 조항이 고쳐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위 사진은 지난해 10월 미국에서 사망한 백두현씨가 1967년 월남전에 참전한 모습. /백정순씨 제공


미국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백정순(72)씨는 24일(현지 시각) 한국 방문 길이 막힌 아들이 국가유공자인 선친의 유해를 충북 국립괴산호국원에 안장할 수 있도록 한국 법을 개정해 달라는 탄원서를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냈다. 40년 전 미국으로 이민한 백씨의 아들(37)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인 교포 2세다. 뉴욕 유엔 본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백씨의 아들이 한국을 찾아 안장하길 원하는 아버지는 지난해 10월 75세 나이로 별세한 고(故) 백두현씨로 월남전 참전 용사다. 1965년 백마부대 소속으로 참전해 3년간 베트남에서 싸웠다. 1984년 11월 세살배기 딸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와 뉴욕에서 아들을 낳고 길렀다. 백씨는 탄원서에 이렇게 적었다. “남편과 30년간 ‘작은 거인’이란 상호로 이삿짐 센터를 운영했습니다. 비록 우리는 힘들게 살았지만 언제나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했고, 아이들에게도 한국인임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월남전 참전 용사인 고(故) 백두현씨가 백마부대 출신으로 월남전에 참전했을 당시 모습. 그는 1965년 백마부대 소속으로 참전해 3년간 베트남에서 싸웠다. 1984년 11월 3살 딸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와 뉴욕에서 아들을 낳고 길렀다. 그는 작년 10월 별세했다. /백정순씨 제공


남편과 백씨 모두 미국 시민권을 일부러 따지 않고 영주권자로 남았다. 대한민국을 잊지 않겠다 다짐한 많은 교포들과 같이, 한국 국적을 유지하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다. 백씨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잊혀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국의 영주권자는 투표권⋅피선거권 등만 없을뿐 불편함 없이 생활할 수 있다.

백씨의 아들은 평생 고국을 그리워하며 산 고인(故人)의 뜻을 기려 아버지의 유해를 한국에 모시기 위한 절차에 착수했다. 그 과정에 생각지도 못한 소식을 들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인 줄 알고 살았던 그에게 본인도 모르는 한국 국적과 함께 병역 의무가 부과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백씨 모자는 “한국 호적에도 안 올라 있는데 졸지에 ‘병역 기피자’가 되어 있음을 알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아들이 배웅하지 못한다니 말이 되느냐”고 했다.

백두현씨(오른쪽에서 둘째)가 미국 이민 후 아내 백정순(맨 왼쪽)씨, 딸(맨 오른쪽), 아들과 나들이하는 모습. /백정순씨 제공


세상을 뜬 백두현씨는 생전 가족들에게 “비록 몸은 미국에 있지만 죽어서라도 고국에 묻히고 싶다”고 이야기해 왔다. 백씨 모자는 유언을 따라 한국 방문 준비를 하다가 뉴욕 총영사관으로부터 ‘한국 방문이 어렵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아들이 ‘선천적 복수국적자’라 한국을 찾게 되면 미국에 곧바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생긴 이유는 2005년 개정된 국적법 때문이다. 가수 유승준(47)의 병역 기피 논란이 한창이던 때 개정된 이 법에 따르면 한인 2세가 태어날 당시 부모 중 한 명이라도 한국 국적(영주권자 포함)일 경우 출생과 동시에 한국 국적이 자동적으로 부여된다. 만 18세가 되는 해 3월 전까지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으면 만 37세가 되는 20년간 병역 의무가 부과된다. 그 기간 동안 한국 국적을 포기할 방법은 없다. 심지어 이 법은 1983년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이들에게 소급 적용됐다. 백씨 모자에 따르면 개별 통지도 없었다 한다.

월남전 참전용사인 고(故) 백두현씨(맨 왼쪽)가 미국 뉴욕으로 이민와 아들 딸과 함께 찍은 사진. 작년 10월 백씨 별세 이후 국가유공인 선친의 유해를 한국에 안장하려던 아들은 최근에야 자신이 선천적 복수국적자라 한국 방문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백정순씨 제공


원정 출산 등을 악용한 병역 기피를 막겠다는 취지였지만, 실제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해외에서만 자란 재외동포 2·3세들이 졸지에 ‘잠재적 병역 기피자’가 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교포 2세 여성들도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맞닥뜨리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미국 정부 기관은 복수국적자를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취직 문턱까지 갔다가 자신도 몰랐던, 이중국적자라는 사실이 드러나 탈락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2020년 현행 국적법이 헌법상 과잉금지 원칙에 위반된다며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에 국회는 한국 국적 포기 신고 기한을 제한적으로 연장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동포 사회에선 “국적 포기가 너무 어려워 현실성이 없다”는 불만이 여전히 나오고 있다. 백씨 아들처럼 한국에 출생 신고가 돼 있지 않은 ‘선천적 복수국적자’는 부모의 혼인 신고 및 국적 상실 신고, 자녀의 출생 신고 등을 마친 끝에야 국적 이탈 신청을 할 수 있다. 이후에도 법무부에 ‘복수 국적 탓에 불이익을 받았다’고 증명하는 자료를 제출해 승인을 받아야 한다. 서류 처리 기간이 1년 넘게 걸리는 데다가, 승인도 거절되기 일쑤다.

전종준 미국변호사는 본지 통화에서 “원정 출산 등을 통한 병역기피자들은 대부분 한국이 주(主) 생활 근거지고, 단기 비자를 취득하고 있다”며 “17년 이상 해외에서 거주한 복수국적자나 영주권자·시민권자 자녀 등에 대해선 ‘국적 자동 상실’ 조항을 넣어 더 이상의 피해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2020년 헌재에서 공개변론에 나서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끌어냈던 그는 “해외에서 태어난 동포 2·3세들을 잠재적 죄인으로 취급해 모국 방문을 막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했다.

워싱턴=이민석 특파원 [email protected]

<출처: https://n.news.naver.com/article/023/0003777954?type=journali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