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 대사관의 부당한 비자 거부는 가족의 만남을 막는 인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민법 어디에서도 ‘극도의 강한 연대’를 요구하는 법 조항이 없다. 미 국무부에 이에 대한 법적 의견서를 요청했으나 역시 대사관의 설명만을 되풀이했다.
1년이 지나자 K씨마저 미국 방문을 포기했다. 난 포기할 수 없었다. 변호사비도 받지 않고 주말까지 일하는 나에게 아내는 건강을 생각해 제발 쉬라고 했다. 밤잠을 설쳐 위장병이 재발됐다. 의사는 방치하면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며 스트레스를 피하라고 충고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2000년 6월 20일, 워싱턴지역 한인회 회장단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 언론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미 대사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무렵 한 모임에서 레인 에번스 미 연방 하원의원을 만났다. 당시 10선 의원이었던 그는 일본군 정신대와 고엽제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인권운동에 많은 업적을 쌓은 인물이었다. 그는 주한 미 대사관의 부당한 비자 거부에 대한 나의 뜻을 이해하고 국무부에 편지를 보내 해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답변은 전에 받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의 오기는 또 발동하기 시작했다. 2001년 7월 10일, 국회의사당 의원회관에서 에번스 의원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었다. 에번스 의원의 기조연설 후 내가 부당한 비자 거부에 대한 법적 설명을 했다.
그러나 미 국무부에서는 ‘극도의 강한 연대’에 대한 법적 해석을 회피했다. 마지막 카드로 2002년 4월 15일, 미 국무부의 수장인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상대로 워싱턴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법원은 “국가 행정행위는 재판 관할권을 벗어난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난 승복하지 않고 두 번째 소송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K씨가 미 대사관에 방문비자를 신청하니 영주권 신청한 것과 관계없이 방문 비자를 발급해주었다. 4년만의 결과였다. 드디어 2003년,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에번스 의원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20년 이상 행해온 한국인에 대한 주한 미 대사관의 차별적 비자 발급 관행이 종식됐음을 알렸다. 최근 미 국무부에서는 방문비자 신청서에서 “영주권을 신청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삭제하였다. 이는 10년만의 성과이며, 전 세계적인 파급 효과를 낳았다.
미 대사관의 부당한 비자 거부 관행에 시정을 요구하며 벌였던 첫 번째 인권운동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인권운동은 피나는 외로운 전투였기에 다시 나서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한 일간지에서 혼혈인을 돕는 한 사회봉사자의 기고를 읽었다. 한국에서 혼혈인은 학교에서 놀림을 당해 학업을 중도 포기해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해 변변한 직업도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신문을 읽는 중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아이들이 마치 내 아이처럼 느껴졌다.
당시 미국 유학 붐이 일고 있던 터라 나는 학생비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미 이민법을 집필 중이었다. 2003년 9월, ‘미국 비자로 미국 유학 쉽게 가기’란 책을 한국에서 발간했다. 책에서 나온 기금을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에게 전달하고 혼혈인 인권 개선을 위해 써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송 목사는 혼혈인 인권 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시도했다. 한국에선 비교적 빠른 시간에 혼혈인 인권운동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병역법에서 ‘혼혈아’를 ‘혼혈인’으로, ‘혼혈인’ 대신 ‘다문화가족’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또 혼혈인은 군대에 갈 수 없다는 병역법이 개정돼 본인의 선택에 의해 입대할 수 있게 됐다.
정리=이지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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