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일 체인지를 하러 개스 스테이션에 들렸다.
잠시 기다리던 중 어느 분이 내게 다가오더니 “안녕하세요, 전 변호사님. 꼭 한번 뵙고 감사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여기서 뵈니 참으로 다행이에요” 하며 반갑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얼떨결에 인사를 받으며 “혹시 누구신지요”라고 물었더니, “변호사님께서 도와주셨던 혼혈인 운동에 감사하고 있는 혼혈인 목사입니다” 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 분을 자세히 보는데 혼혈인 같아 보이지 않아서 “혼혈인 같지 않네요” 했더니 나이가 70이 되니 점점 한국사람 같이 보여서 몰라본다고 하면서 웃었다. 언제 같이 식사나 하자며 헤어졌다. 혼혈인 운동에 감사하다는 그 말을 들으며, 누군가 작은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 마음이 너무 감사했다. 조금씩 잊혀져가고 있던 일들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내 아이들이 혼혈이어서인지 난 그들의 인권에 관심이 많다. 2004년 4월에는 미 의회 사상 처음으로 5개국(한국, 베트남,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출신 ‘혼혈인 자동시민권 부여 법안’을 레인 에반스 의원을 통해 미 하원에 상정하였다. 여러 노력 끝에 한국에서는 ‘혼혈인’ 이라는 말 대신 ‘다문화 가족’ 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탄생하게 되었고, 혼혈인은 군대를 갈 수 없다는 병역법이 개정되어 입영이 가능하도록 시정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쌓인 혼혈인에 대한 차별과 굳어진 인식은 하루아침에 깨뜨릴 수 없었고 그로 인한 혼혈인들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태이다.
연락이 와 다시 만난 목사님은 백인인 군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버지의 얼굴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래도 본인은 행운으로 어머니와 살았지만 출생 후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란 혼혈인도 제법 된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50년 6.25 전쟁이후 부터 1982년 사이에 미국 국적 아버지를 가진 혼혈인에게 영주권을 부여해 주는 ‘혼혈인 법안’을 통해 미국으로 올 수 있었다고 한다. 미국에 와서 밑바닥부터 일을 힘들게 하면서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쳤으며, 중간에 틈 날 때 신학교에 다니면서 20여년 전에 혼혈인으로서는 아마 처음일지는 모르지만 목사가 되었다고 했다. 처음 목회를 할 때, 교인들이 자신을 보고 “목사님 혹시 ‘튀기’ 아니야?”라고 하기도 했지만 자신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내왔다고 한다. 아직도 대부분 그의 지인은 그가 혼혈인인지 모르고 있다고 한다.
이제 나이가 들면서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감사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어머니는 재혼할 기회도 있었는데 자신을 키우기 위해서 모든 것 희생하고 수많은 고생을 했는데 그런 어머니와 많이 싸우고 실망시켜드린 것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비록 아버지 사랑은 모르고 살았지만 내 자녀들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기에 아버지를 찾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했다.
아마도 많은 혼혈인들이 밖에서 받은 상처를 어머니에게 다시 입히며 살았을 것이다.
어머니들의 고통 또한 어땠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하면 이들의 상처를 안아줄 수 있을까? 난 또 하나의 숙제를 안고 돌아왔다.
아직도 미제로 남아 있는 ‘혼혈인 시민권 자동 부여안’과 1982년 이후 출생한 혼혈인에게 아버지 나라인 미국으로 올 수 있는 길을 언제나 다시 열어 줄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아야겠다.
<전종준 / 변호사,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