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스쿨에서는 판례법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영미법 제도에 입각하나, 한국은 독일과 프랑스 법에 바탕을 둔 대륙법 제도를 택하고 있다. 한국에서 법을 공부했던 난 모두 백지화하고 이곳에서 새로운 법체계를 배웠다. 가장 어렵다고 하는 로스쿨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2학년 때부터 장학금을 받아 경제적 부담이 많이 줄게 됐다. 로스쿨 3학년 때 국제적십자회의 디렉터이며 국제 공법의 권위자인 지리 토먼 박사가 교환교수로 와서 국제법을 강의했다. 국제법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지필 수 있었다.
1990년 5월, 드디어 산타클라라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한국에서는 로스쿨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로스쿨을 졸업하기 전 스탠리 쿡(Stanley Cook) 법률사무실에 취업됐지만, 일은 변호사 시험이 끝나는 8월 초부터 정식으로 하기로 했다. 스탠리 쿡 변호사는 캘리포니아 주 부검찰총장을 지내고 미국사회와 한인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변호사였다.
졸업 후 두 달 동안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특강을 들었다. 대부분 학생들은 지난 3년 동안 공부한 것을 이 특강을 통해 복습하면서 변호사 시험을 준비한다. 7월 말, 시험장에 일찍 도착했는데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시험장소가 바뀌었다면 큰일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와 멍하니 있는데 누군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시험감독이 가끔 빌딩을 헷갈려 하는 응시자가 있어 밖에서 보고 있었다고 했다. 헐레벌떡 뛰어가 겨우 시험 시간에 맞춰 들어간 나는 심장이 뛰고, 머리가 띵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간신히 시험을 치렀다.
변호사 시험이 끝나자 쉴 틈 없이 스탠리 쿡 법률사무소에서 수습변호사로 일하게 됐다. 제일 먼저 배운 것이 이민법이었다. 한인 사회가 있는 곳에서는 이민 문제 한두 가지씩 없는 집이 없기 때문에 이민법이 가장 필요한 분야였다. 앞으로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 같았다. 변호사 시험 발표가 나고 자격증만 받으면 끝나는 걸로 보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변호사 시험에 떨어졌다. 시험 보는 날 너무 당황한 탓에 조금 어려웠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떨어진 것이다. 사무실에 낙방 사실을 말하고 고민하고 있으니 동료들은 “다시 보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했다. 그 무렵 아메리칸대학교 로스쿨 입학 허가서가 도착했다. 만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면 입학 허가를 무시했을 텐데 그 상황에선 캘리포니아에 남아 다시 시험에 응시할 것인지, 학교가 있는 워싱턴DC로 갈 것인지 고민하며 기도했다. 그때 아메리칸대 로스쿨에서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다.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하고 아메리칸대 로스쿨로 가서 국제법을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래 어차피 워싱턴DC로 가야하니 변호사 시험도 그곳에서 보자.”
미국 변호사 시험은 7월과 2월에 치러진다. 2월에 있을 워싱턴DC 변호사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두 달 동안 시립도서관에서 밤낮없이 공부했다. 드디어 변호사 시험 합격통지서를 받았고, 공부 때문에 5년 동안 미루어왔던 아기가 생겼다. 나의 첫 아들 벤자민이 태어난 것이다. 세상을 다 얻은 듯이 행복했다. 현재 돈을 벌지 못한다는 두려움도, 이 공부가 끝나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고민도 들지 않았다. “물가에 심은 나무가 그 시절을 쫓아 열매 맺으며,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않음 같이 그 하는 일이다 형통하리라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저는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메리칸대에서 좋아하는 국제법 공부를 하다보니 시간이 빨리 지났다. 1년 만에 국제법 LLM(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결국 학위란 모든 것을 다 배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부터 배울 마음의 준비가 되었음을 뜻한다는 것이다.
정리=이지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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