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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봄, 석사학위를 받고 군복무 때문에 잠시 귀국했다. 집안 어른들은 나를 보자마자 결혼을 하라고 하셨다. 중매쟁이가 우리 집을 바쁘게 드나들었다. 미국에서 대학원도 마쳤고 6개월간 석사장교로 군복무만 마치면 다시 미국으로 가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변호사가 될 수 있다는 근사한 포장 때문에 선 자리가 꽤 많이 들어왔다.
미국에 있는 크리스가 생각났다. 한국으로 떠나올 때 시카고 공항까지 배웅해준 그녀는 작별을 슬퍼하며 계속 울기만 했다. “크리스, 당신은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 남자는 당신이 아니잖아요.” 난 할 말을 잃고 슬피 우는 그녀를 뒤로한 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힘든 미국 생활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존재였던 그녀는 늘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고 용기를 주었으며 삭막한 시간들 속에서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주었다. 돌이켜보면 그녀는 항상 나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고 희생하고 도왔으며 함께 있는 동안 늘 웃었다. 애써 모르는 척했지만 어쩌면 난 진작부터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뼛속까지 한국인이었던 나는 서양 여자와 결혼한다는 걸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부모님이 좋은 가문의 아가씨와 선을 보라고 하실 때마다 내 귀에는 “그 남자는 당신이 아니잖아요”라는 크리스의 음성이 쟁쟁하게 들렸다.
그건 사랑이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친구 이상은 아니라고 누누이 말했지만 내 마음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군대 가기 하루 전날 밤, 부모님께 미국에서 사귀던 미국 여자가 있는데 결혼을 하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두 분은 충격을 받으신 듯했으나 그 다음날 군대 가는 아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으셨는지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해라. 하지만 군대에 있는 동안 잘 생각해 보거라”고 말씀하셨다. 군대 가면 혹시나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기대하셨던 것 같다. 심한 반대에 부딪힐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만 해도 너무나 기뻤다.
반가운 마음에 그녀가 다니는 직장으로 그날 밤 전화를 했다. 미국은 낮이었다. 그녀는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참석하러 일리노이로 잠시 갔다고 했다. 내일이면 입대하는 나는 급한 마음에 전화를 받은 그녀의 직장 상사에게 “크리스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았으니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해야 하는데 결혼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아내는 내가 자기 보스를 통해 프러포즈를 했다고 놀려대곤 한다.
86년, 크리스와 결혼한 후 캘리포니아에 있는 10개의 로스쿨에 입학원서를 냈다. 입학허가를 기다리는 동안 한인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주중에는 카페테리아 서빙 일과 식료품 배달, 그리고 주말에는 세탁소 잡일을 했는데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겨우 하루 소득 20달러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은 트럭 한 대에 실린 물건을 옮긴 후, 끼고 있던 가죽장갑이 걸레처럼 너덜너덜 찢어져 있었던 일이다. 외국인에게 부림 받으며 일하던 이때의 경험들이 아마 이민자들을 돌아보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 같다.
10개 로스쿨 중 입학거절을 당한 곳이 7곳이나 되었고, 2곳은 합격 대기자에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산타클라라 대학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Congratulations(축하합니다)’란 단어를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환호성을 지르며 직장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는 목이 메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난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늘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이루어주시는 주님, 은혜가 넘치옵니다. 주께서 시켜주신 인생수업으로 더 강해지고 더 겸손해지겠습니다.”
정리=이지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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