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내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때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
네 번째 토플 시험의 결과는 ‘통과’였다. 그날의 기쁨은 ‘나도 할 수 있구나’였다. 아슬아슬하게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해결해주시는 ‘지각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감사했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학기 성적도 좋았고 토플도 무난히 통과했으니 전공 분야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러나 문과 공부는 영어의 이해가 부족하면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 또다시 높은 수준의 영어를 요구하는 인문계 학문의 깊이가 새로운 장벽으로 다가왔다.
중간고사를 보았는데 미국헌법 과목에서 C학점을 받았다. 대학원에서의 C학점은 낙제를 뜻한다. 최소한 B학점은 받아야 통과할 수 있었다. 너무 큰 충격이었다. 갑자기 우울증이 찾아왔다. ‘역시 나는 안 되는 건가.’ 내 몸은 점점 말라갔다. 식욕도 없고 무기력했다. 눈을 감으면 “그러면 그렇지.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하지 않더냐” “저 녀석은 안 된다니까”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할 수 있다’는 생각 대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먼데, 그냥 주저앉고 싶었다.
공부를 계속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정말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다. “하나님, 정말 죽을 것 같습니다. 잠을 잘 수가 없고 귀에서는 친구들의 비웃음 소리가 나 한 순간도 쉴 수 없습니다. 나를 살려 주십시오.”
열심히 기도하는 중에 마음속에 누군가 가만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성경 구절을 읽어 주는 듯했다. 그렇다. 나의 힘으로는 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이 도우신다면 나는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모처럼 힘이 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올라오는 듯했다. 하나님은 나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다.
나의 우울증 증세를 눈치 챈 유학생 부부가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사람이란 참 간사한 동물인가보다. 마음속에 ‘할 수 없을 것 같다’란 생각을 했을 때는 죽고 싶고 모든 것이 다 의미 없어 보였는데 이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갑자기 힘이 나고 다 좋게 보였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이런 것인가 보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면서 C학점을 준 교수에게 오기가 발동했다. 헌법 교과서와 노트를 무조건 외우고 수업시간에 무조건 말이 되든 안 되든 질문을 해댔다. 나의 적극적인 자세를 보고 커원 박사는 조금은 놀라는 기색을 보이더니 기특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기말고사를 치르고 그 어렵다는 헌법 과목에서 B+학점을 받았다. 우울증으로 공부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갈 뻔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과 주위의 도움으로 잘 극복해 한 번의 좌절을 넘은 것이다.
천국과 지옥을 수없이 왕래했던 나의 유학 시절은 승리나 패배 어느 한 쪽에도 머무르지 않았다. 승리의 노래를 부르노라면 패배가 부르고 있었고, 패배로 절망하고 있는가 하면 승리가 손짓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런 나를 즐기시며 훈련시키셨다.
미국에서 살아남으려면 공부도 중요하지만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주말에는 웨이터를 보조해주는 버스보이(bus boy), 일식집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느덧 정치학 석사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것은 논문이었다. 보통 석사학위 논문은 한 학기 안에 마치는 것이 쉽지 않다고들 했다. 그러나 난 꼭 해야만 했다. 석사 장교로 가기 위해선 마지막 봄 학기에 석사학위 논문을 끝내야만 했다.
정리=이지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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