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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공부는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반에서 시작했다. 강사는 학생들끼리 서로 질문을 많이 하고 이야기를 하라고 권했다. 어설픈 영어로 서로 이야기하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영어가 조금씩 나아져 갔다. 또 기독학생회에서 운영하는 성경공부 클래스에서 성경공부도 하고 영어도 배웠다.
그 무렵 도서실에서 갈색 눈의 크리스를 만났다. 대학원에서 행정학을 공부하고 있던 그녀는 잘 웃고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수줍음이 많았던 난 말을 걸지 못했다. 어느 날 크리스가 자신의 친구 이사를 도와 달라고 했다. 이삿짐을 다 나르고 처음으로 단둘이 저녁을 먹게 됐다. 그 후 친구가 됐다. 그녀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수호천사 같았다. 학교 리포트 타이핑과 영어발음 교정을 도와주었다. 미국인들은 악센트가 있는 외국인의 말을 들어주는 데 인내가 부족한데 그녀는 베트남 난민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어서 어떤 미국인보다 내 말을 잘 이해했다.
1983년 당시 미국의 대학원에서 요구하는 토플 점수는 550점이 넘어야 했다. ESL 과정 중에 토플을 통과해야만 가을 학기에 대학원을 갈 수 있었다. 봄 학기 중에 처음으로 토플 시험을 보았는데 500점 근처를 맴돌았다. 한 달 뒤에 다시 응시했으나 마찬가지였다. 가을 학기는 다가오는데 난 아직도 대학원에서 요구하는 토플 점수를 받지 못해 대학원 정규과정을 등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학교 측은 나에게 특별한 배려로 대학원 한 학기가 끝날 때까지 토플을 통과하기로 하고 강의를 듣게 허락해 주었다.
난 정치학과에 입학해 국제정치학을 전공하려 했다. 정치학을 공부하면 내가 하고 싶은 국제법을 공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치학을 공부해 보니 한국에서 공부했던 사회과학 및 법률지식의 바탕으로 이해가 빨랐다. 공부도 재미있었고 도서실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고 시험을 준비한 탓에 성적도 아주 우수했다. 비록 토플 점수는 낮았어도 학과공부 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학기 중 세 번째 토플시험에 응시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점수가 조금 모자랐다. 토플 점수가 550 이상이 안 나오면 지금 잘하고 있는 공부도 소용없을 판이었다. 반드시 가을 학기가 끝나기 전까지 토플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영어에 대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찾아온 길이 영어 때문에 또다시 막히게 될 줄은 몰랐다. 한국을 떠날 때 공항에 배웅 나왔던 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사법고시 떨어진 녀석이 유학 가더니 그러면 그렇지”라고 할 것 같았다.
만사를 제치고 지난 토플 기출문제를 하나하나 풀어 가면서 내가 틀린 이유를 분석했다. 반복해서 토플 문제를 풀어보니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나올 거라고 예상이 되며 조금씩 자신이 생겼다.
네 번째 토플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만약 이번에 통과하면 나는 가을 학기 성적을 인정받고 다음 학기 등록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보따리를 싸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쩌지?’ 군대를 연기하고 2년 만에 대학원 과정을 마쳐야 석사 장교를 지원할 수 있기에 나는 마지막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예전에는 공부에 실패해 한국으로 돌아가면 사람들 얼굴을 어떻게 쳐다볼지 걱정했는데 이번엔 달랐다. ‘이젠 다 내려놓고 기꺼이 한국으로 돌아가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창피한 것도 남의 눈치 보는 것도 다 잊을 수 있었다. 이번에 안 되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심정으로 마지막 토플 시험에 응했다. 드디어 발표 통지를 담은 우편물이 왔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봉투를 열었다.
정리=이지현 기자 [email protected]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4647348&code=23111513&sid1=m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