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산책을 나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냥 푸르다고 느꼈던 나무들이 어느새 진녹색을 띠고 있었다. 이 길은 불과 이 년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과 걸으며 오디를 따던 바로 그 공원길이다.
아버님 가신지 일 년… 또다시 아버지날은 다가오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어찌 좋은 일만 있을 수 있겠는가? 힘든 일이 생기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순간이 있지 않은가?
난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부모님 댁으로 갔다. 그저 말없이 같이 식사만 해도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아버님은 내게 묻지 않으셔도 내 표정으로 다 아시는 것 같았다.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해주시면서 내 마음을 만져주시곤 했다.
아버님은 임종 하시기 전에 정신은 맑으셨는데 대소변을 가리기는 힘드셨다. 마침 내가 있을 때 대변을 보셨는데 아무도 없어서 내가 치워드렸다. 그러자 아버님은 “내가 너에게 이런 걸 시키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시는 것이었다. 아버님 가시기 전에 기저귀 한 번 바꾸어 드린 것 가지고 미안해 하시는 아버님의 모습을 보며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자식의 기저귀는 수도 없이 바꿔주어도 당연하다 생각해도 자신의 기저귀는 자식에게 맡기고 싶지 않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구나 생각했다.
하버드 대학의 한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행복과 건강을 좌우하는 것은 성공이나 돈이 아니라 ‘관계’라고 한다. 관계도 ‘질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간의 우애를 중요시 하라는 말을 쉴 새 없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어디 그러한가? 부모라고 다 좋은 부모가 아니고, 자식이라고 다 효도하는 세상이 아닌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아닌가?
나는 관계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기적인 관계와 이타적인 관계이다.
아무리 부모 자식 사이라도 이기적일 때에는 정상적인 관계가 유지되기 힘든 반면, 이타적일 때에는 한없이 아름다워진다. 우리 아버님이 그러셨다. 언제나 이타적인 사랑을 주셨고 본인은 클리넥스 한 장 아껴쓰시면서 자식들에게는 끊임없이 베푸시는 분이었다. 일 년 내내 수많은 환자를 보시면서 싫은 기색 한 번 안 내시고 자식들 공부시키시는 걸 큰 기쁨으로 아셨던 분이다. 이런 아버지와의 이타적인 관계가 바로 질적인 관계인 것이다. 난 아버님을 보면서 내 아들들에게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지를 조금씩 배워간다. 뭔가 아들이 힘들어 보일 때, 무슨 일이냐고 묻기보다는 그저 밥을 같이 먹어주고, 등을 빌려주는 그런 아버지, 아들이 조금 잘할 때는 많이 칭찬해주고, 실수했을 때는 나도 그랬었다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그런 아버지가 되고 싶다.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어머니는 진흙, 아버지는 토기장이. 진흙 없이 토기가 존재할 수 없고, 토기장이 없이는 진흙은 토기로 탄생할 수 없다. 어머니는 날 낳으시고 아버지는 날 빚으셨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부모님의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내가 실패했을 때나 힘들었을 때나 격려해 주시고 다독여 주셨던 아버지. 조그마한 기쁜 일도 나보다 더 기뻐해 주셨던 어머니 같은 아버지.
20년 전에 부모님 이름으로 웨슬리 신학교에 장학기금을 마련했고, 돌아가신 뒤에는 아버님 유지를 받들어 한인 교회에 ‘전석구 장학금’을 만들었다. 아버님의 배움에 대한 열정과 이타적 사랑을 오늘도 장학회를 통해 살아 있음을 느낀다.
코로나19 사태로 시국이 어수선한 이 때, 아버님과 이 공원을 걸었다면 아버님은 내게 어떤 말씀을 해주셨을까? 아버님이 몹시도 그리운 요즈음이다. 아버지 같이 든든한 어머니가 옆에 계시지만, 하늘에 대고 말해 본다. “아버님 고맙습니다. 해피 파더스 데이!”
<전종준 / 변호사,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