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992년 LA 폭동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코로나 19로 인해 온 미국이 혼란에 빠진 이때, 우리는 조지 플로이드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평화로운 집회가 밤이면 폭도들의 분노의 집회로 변질되는 모습을 보고 있다. 나는 매일 연이어 날아오는 폭도들의 소식에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생각났다. 낮에는 평화롭게 시위하려고 노력하는 시위대가 밤이면 폭도로 변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가진 또다른 시위대들인지 알 수 없다.
이번 플로이드 사망을 보면서 우리는 공권력을 남용한 경찰의 가혹한 처사에 분노하거나, 폭도들의 행동을 비판하면서 여러 평가와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정작 이 사건을 ‘자신의 문제’로 보는 이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플로이드 사건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얼마 전 한 지인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데이트를 하게 된 한 흑인 아가씨가 데이트 상대인 청년의 차가 너무 좋아서 기분이 좋았는데, 차 안을 보니 아기 물티슈와 곰인형이 있어 유부남인가 의심이 되었다고 한다. 청년에게 “결혼했냐”고 물으니, 청년은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왜 이런 아이들 용품이 차 안에 있냐”고 물으니, 청년은 “비싼 차를 운전하고 다니면서 여러 번 경찰한테 검문을 당했다”고 했다는 것이다. 즉, 백인 경찰의 눈에는 흑인 청년이 좋은 차를 몰면 ‘훔친 차’이거나 혹은 ‘마약범’인 걸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이에 경찰서에 있는 지인이 차 안에 아이들 용품이 놓여 있으면 결혼을 한 안정된 가장으로 보일 수 있다고 자문해 주어 그렇게 하고 다닌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를 몰랐다. 백인들은 이런 선입견에 기초한 인종차별을 당해 본 적이 없기에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인종차별은 비단 미국의 문제만이 아니고, 유럽과 아시아를 포함한 모든 세계가 앓고 있는 또 하나의 전염병이라고 할 수 있다.
전염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보이는 전염병’이요, 또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염병’이다. 먼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염병은, 지금 전세계에서 퍼지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이 자연에서 생성된 전염병이다. 보이지 않는 전염병은 코로나 19처럼 사회적 지위나 재산상태에 준한 강자와 약자를 차별하지 않고 공격하기에 모두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반면, 눈에 보이는 전염병은, 플로이드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인종차별과 같은 ‘불평등 바이러스’로 사람이 만들어 낸 전염병이다. 인종차별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움’과 ‘이기’에서 온다고 본다. 피부 색깔, 인종, 종교, 혹은 출생지에 따른 다양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배척하고 차별하다 결국 ‘미움’이 생기고 퍼져 사람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 이러한 눈에 보이는 전염병은 사람의 신분과 재산상태에 따라 번지는 속도와 정도가 다르기에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특히 두려움을 갖게 되는 특징이 있다.
현재 미국에는 이 두 가지 전염병이 동시에 덮쳐 미국의 경제와 사회가 큰 몸살을 앓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악화될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사람의 선입관은 매우 비합리적이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어서, 특정 인종이나 집단에 대한 생각이 어느 한 사람 개인을 평가하는 것이기보다는, 누군가를 대할 때 은연중에 마음 속에 한자락 깔고 상대방을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같은 인종이라도 나보다 못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소위 ‘갑질’이라는 ‘사람 차별’의 행동을 함으로써 ‘인종 차별’보다 조금도 낫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끊어지지 않는 이 전염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서로를 인정하는 ‘마음의 백신’을 스스로에게 투입시키는 것이다. 비단 백인과 흑인만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아닌 내 속에 뿌리 깊게 박힌 ‘나보다 못한 자’에게 휘두르는 ‘생각의 폭력’부터 최우선적으로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나선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You are not alone)”라고 먼저 손을 내밀 때, 우리는 플로이드가 마지막 희생자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전종준 / 변호사,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