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준 변호사의 스토리가 국민일보 mission life 쿠키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아래 주소를 참조하세요.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003672633&code=23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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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하나님-전종준 변호사] 철저히 내려놓은 후 쓰임받아
미국 워싱턴 DC 로펌의 대표 변호사이자 인권 변호사로 나는 오늘도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사람들은 변호사인 나에 대해 적당히 공부를 잘하고, 평탄하게 살아왔을 것이라며 부러워한다. 하지만 나는 실패와 좌절,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 자리에 와 있다.
어머니를 따라다니던 교회학교도 중학생이 되면서 멀어지게 됐다. 고등학교 시절엔 변호사가 되겠다고 학교 공부 대신 법전을 끼고 살았다. 본고사는커녕 예비고사조차 떨어졌다. 남들 보기에도 창피한 결과였다. 그때 철야기도를 하던 어머니는 낙심한 나에게 “종준이는 걱정마라”라는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고 전해주셨다. 순간 나에게는 마음의 평화가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예비고사도 떨어진 재수생은 창피해서 교회도 나가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골방에서 기도하던 중 방언이 터지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체험했다. 그렇게 하나님을 다시 만난 나는 이른바 이류대학을 전전하며 사법고시에 응시했으나 1차 시험에서부터 낙방했다. 이유는 영어였다.
결국 영어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아버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주위로부터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비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영어를 못하는 나에게 유학은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체면과 비웃음이 두려워 포기할 수도 없었다.
이러지 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때, 하나님은 다시 내게 오셨다. 철저히 내려놓은 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나에게 언제나 하나님은 그랬다. 이후 안정을 찾은 나는 내브래스카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와 산타클라라 로스쿨의 법학 박사, 그리고 아메리칸 대학의 국제법 석학 과정을 마치면서 영어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것을 깨달았다. 영어 때문에 사시에 떨어진 법대생이 지금은 영어로 변호하는 미국 변호사가 되었다.
예상치 못한 역설적 축복이었다. 변호사가 돼 편하게 정착하고 싶어할 때, 하나님은 받은 은혜를 남에게 나눠주라고 내 등을 미셨다. 미주 동포사회의 가장 큰 관심사인 신분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이민 전문 변호사로서 남이 하지 않는 한인 인권에 눈을 돌리게 하셨다. 1994년 한국 최초로 미 이민법 저자가 되었으며, 이후 8권의 이민법 관련 저서에서 나온 이익금 전액을 한국의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했다.
영주권 신청자에게는 방문비자를 발급하지 않는 미 대사관의 20년 된 부당한 관행을 콜린 파월 당시 국무장관을 상대로 소송해 승소함으로써 바로잡았다. 2003년에는 이민법책 이익금을 하이패밀리 송길원 목사님에게 기부했다. 이로써 한국에서 본격적인 혼혈인 인권 캠페인을 시작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 레인 에반스 하원의원을 통해 한국계 혼혈인 시민권 자동 부여 법안을 최초로 미 하원에 상정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아직 통과되지 못했다. 이 밖에 태국과 중국에서 온 탈북자에게 미 영주권을 받을 수 있도록 무료 변론도 해줬다. 이 모든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고백한다. 하나님은 날 인도하셨고 지금도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자들의 소리를 들으라고 하신다.
성경의 ‘두려워 말라’는 내가 두려움 없이 남이 하지 않은 최초를 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최초가 최고는 아니다. 최고는 아무나 할 수 없으나, 최선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할 때 남이 하지 않은 최초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꿈을 꾸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정리=워싱턴 김명호 특파원